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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요한 교수 프로필 나이 고향 국적 가족사 정치성향 총 정리

by 호박토마토올리브 2023.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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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이 23일 당 쇄신 작업을 이끌 혁신위원장에 인요한 연세대 의대 교수를 임명했습니다.

인요한 교수의 프로필과 나이 고향 국적 가족사 정치성향에 대해 총 정리 해드리겠습니다.

 

 

인요한 교수 프로필

 

 

 

인요한 교수 가족사

 

인요한의 진외증조부 유진 벨[A]은 스코틀랜드계 미국인이며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로 1895년 4월 8일 한국에 파송되어 광주·목포 지역에서 활동하며 학교와 병원을 설립한다. 그의 딸 샬롯 벨은 인요한의 친할아버지 윌리엄 린튼과 결혼한다. 윌리엄 린튼은 미국 앨라배마주에서 태어났으며 22세 때 한국에 와서 48년간 전주와 군산 일대에서 선교와 교육, 의료봉사를 해왔다. 백범 김구 선생의 주치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고 3.1 운동 당시에는 기미독립선언서 작성 참여와 운동의 지원, 해외에 홍보를 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이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고초를 겪은 적 있는데, 그 공로가 인정되어 2010년에 3.1 운동 91주년 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아버지 휴 린튼은 윌리엄 린튼의 3남이다. 할아버지의 선교활동 영향으로 전라북도 군산에서 출생하였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태평양 전역에서 포로로 잡힌 한국인 노무자들을 돌보기도 했다. 이후 신학대학을 다니던 중 한국전쟁 소식을 듣고 해군장교로 복귀해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였다. 이후 자신의 아버지인 윌리엄 린튼의 한국 선교활동을 이어받았다. 어머니 로이스 린튼은 미국 플로리다 출생의 미국인이며 신학대를 졸업하고 결혼을 통하여 남편을 따라 한국으로 이주했고 현재도 한국에 거주 중이다.

 

둘째형 스티브 린튼은 북한 어린이에게 의약품을 보내는 유진 벨 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80회 이상 방북했으며 김일성과도 두 차례 만났다. 4대째인 인요한 자신은 2012년에 한국사회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특별귀화를 통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인요한의 형 스티브 린튼(인세반), 5대째인 조카 데이비드 조나단 린튼(인대위), 조카 레이첼 조이 린튼도 독립유공자의 자손에게 부여하는 대한민국 국적을 수여받고 복수국적을 허용받았다. 기사에 인요한의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의 독립운동 기여 공로가 소개되어 있다.

 

연세대 의과대학 동창 인연으로 만난 치과의사 출신의 한국인 여성과 결혼하였다. 자녀로는 1남 2녀를 두고 있다. 2021년 4월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인요한의 조카 데이비드 조나단 린튼(한국명 인대위)이 출연했다. 직업은 변호사로 인요한의 첫째 형(데이비드 역크 린튼)의 아들이다.

 

 

인교한 교수 정치성향

 

정치 성향은 보수주의자로, 국민의힘에 입당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흔치 않은 전라도 출신 보수주의자이다. 사실 어릴 땐 자기도 호남 출신이라 보수 정권을 그닥 좋아하진 않았다고 한다. 다만 그의 고향인 순천이 새누리당 당대표까지 맡은 이정현이 국회의원에 당선될 정도로 전라도에선 비교적 진보 색채가 적은 편이긴 하다. 인물중심주의를 지향한다.

 

어쨌든 호남이 고향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호남의 정서와 비슷한 부분도 있다. 후술되어있듯 고향인 호남에 대한 애착을 보이며, 5.18 시민군 통역관을 담당했던 경험으로 보수 일각의 5.18 비하와는 확실히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방송이나 언론 인터뷰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을 존경하고 그의 취임식에 참석했다고 밝혔다. 다만 노무현 정부 이후부터 민주당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이렇게 보면 일종의 호남비노와 겹치는 성향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로 인한 영향인지 2010년대 들어 한땐 박근혜를 지지했다. 그래서인지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거나 햇볕정책에 대해서 비판하며 북한의 핵 포기 의사를 거의 없다고 보았고, 국민건강보험을 해체하고 의료민영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다만 박근혜 정부 취임 이후엔 박근혜 정부가 자기 기준 자꾸 우경화해서인지 친박계와도 멀어져 일종의 비박계가 되었고, 2016년 탄핵 당시에도 찬성했다. 이후 대화의 희열에 출연해 말한 바에 따르면, 자신이 박근혜 정권의 입장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새누리당에 들어갔던 것이지만 착오였다고 멋쩍어하며 실수였다고 밝혔다. 인요한은 결핵 문제 해결을 위하여 의사 자격으로 방북한 경험을 통해 북한의 실상을 잘 들여다봤고, 이를 통해 보수정당이 북한을 제대로 알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추진해보았으나 오히려 당 내에서 좌파 주장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2010년대 초반엔 일종의 미국 국적 호남 출신 특이 경력 전향자라고 생각했는지 여러 보수 언론들이 많이 인터뷰를 했지만, 이때도 인요한은 5.18 민주화운동을 비하하는 발언을 유도하는 일부 보수 언론을 향해 북한의 사주나 개입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적극 반박하고 대북 정책에 있어서도 의료지원은 꾸준히 해야 된다고 주장했는데, 묘하게도 이런 점 때문인지 이후 인요한을 적극 홍보하던 보수 우익 세력들이 그에 대해 관심을 줄인 계기가 되었다.

 

방향성을 정리해 보자면 그와 친분이 있는 김한길 국민통합위원장과 연결해보면 비슷한 방향성임을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 김한길은 김대중의 권유로 민주당에 들어간 뒤 노무현 정부가 무너질 때부터 노무현과 대립각을 세웠으며, 민주당의 내분 후 제3정당을 세우고 이들이 보수당으로 들어간 것, 암투병 후 그가 정계복귀의 방안으로 선택한게 윤석열이었단 점 등 유사한 부분이 보이는 편.